[COVER STORY] 차기철 인바디 회장 - 누구도 가지 않은 길
포브스코리아‘체성분 분석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바디가 지난해 매출 2000억원을 돌파했다. 설립 28년 만에 거둔 역대 최대 실적이다. 지난 1996년 창업에 나선 차기철 회장은 세계 최초로 다주파수를 이용해 신체 부위별 체성분을 측정하는 의료기기 ‘인바디’를 선보였다. 기술 고도화를 향한 차 회장의 집념은 멈추지 않는다. 시대 변화에 따라 예방의학 패러다임에 올라탄 인바디는 원격 진료·모니터링이라는 새 영역에 발을 디뎠다.
격투기처럼 속도감 있는 결투가 있는가 하면 바둑처럼 느린 대결도 있다. 프로기사 둘이 맞서는 정규 대국은 보통 4~6시간이 걸린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두 선수가 마주 앉는 순간 수싸움이 시작된다. 상대방의 수를 내다보기 위해 선수들은 숨죽인 채 고뇌한다. 그들의 숨소리만 옅게 들릴 뿐, 묘한 정적이 바둑판 위를 맴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무색해지는 순간 승패가 판가름 난다.
차기철 인바디(InBody) 회장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선명하게 대응하는 자가 승리하는 싸움”이라고 바둑을 정의했다. 유년 시절 취미를 60대인 지금도 즐기는 ‘프로급 아마추어’의 농익은 철학이다. 차 회장은 경영과 바둑은 비슷하다고 말했다. 지난 30년간 이어온 경영활동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에 연이어 마주하는 여정이었다”고 회상했다.
“경영자는 항상 모르는 일만 다룹니다. 앞날을 온전히, 완벽하게 전망할 수 없기 때문이죠. 언제나 새로운 문제, 처음 보는 문제, 정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가령 인바디를 넘어설 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경쟁사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뻔히 내다보이는 일은 경영자의 고민거리가 아니에요.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은 대개 중요도가 낮습니다.”
차 회장의 경영 여정은 여러모로 바둑과 닮았다. 차 회장은 느리지만 깊은 호흡의 승부사였다. 그는 바둑돌을 천천히 신중하게 내려놓듯 인바디를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1996년 설립된 체성분 분석 전문기업 인바디는 지난해 연 매출 2000억원을 넘어섰다. ‘인바디’라는 단어가 체성분 분석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금의 명성에 비하면 매출 규모는 다소 괴리감이 있어 보인다. “불모지에 가까운 체성분 분석 시장을 개척하는 동안 인바디는 단 한 번의 영업손실 없이 매출액을 늘려왔다”는 것이 차 회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면 인바디 매출은 매해 점진적인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창립 후 약 30년간 인바디는 주력 제품인 체성분 분석기 외에 체수분 분석기, 혈압계, 신장·체중계, 가정용 기기, 웨어러블 기기 등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했다. 또 기기에 적합한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매진한 결과, 체성분 데이터분석 솔루션과 데이터관리 플랫폼, 인바디 리포트 등을 마련했다. 인바디 리포트는 인바디 클라우드에 축적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연도별·국가별·성별·연령대별 체성분 양상을 분석한 자료다. 전 세계 의료·의학계에서 연구 참고자료로 쓰인다.
인바디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데이터 리포트 등을 삼각 편대로 삼아 전 세계 110여 개국에 진출했다. 전체 매출의 약 80%가 해외발(發)이다. 주요 매출처인 일본과 유럽, 미국, 중국 등을 비롯한 해외에서 현지 법인 13곳을 운영한다. 매출 효자상품은 단연 전문가용 체성분 분석기 ‘인바디’다. 체수분과 지방, 근육 등 체성분을 빠르고 정확하게 측정하는 인바디 기기는 대형 병원과 건강검진 센터, 재활 클리닉, 피트니스 센터, 노인 복지·요양시설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난 2월 5일 서울 논현동 인바디 본사에서 만난 차 회장은 여느 청년 못지않게 탄탄한 체형이었다. 차 회장은 건강 비결을 인바디에 돌렸다. “7~10일에 한 번꼴로 인바디 기기를 사용한다”는 그는 “연예인이 카메라 마사지를 받으면 멋있어지듯 ‘인바디 마사지(측정)’를 자주 받으면 건강해진다는 속설이 있다”며 웃었다. 인바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섞인 농담이었다.
세상의 잣대에 눈을 감자 진정한 삶이 열렸다
바둑 대국 중에서도 뛰어난 경기를 명국(名局)이라 부른다. 그 반대는 졸국(拙局)이다. 치졸하게 거둔 승리는 진정한 승리로 보지 않는다. 경기 운영에 품위가 있어 후대에 모범이 되는 대국을 명국으로 평가한다. 이른바 ‘바둑 경영론’을 주창하는 차 회장에게 인바디는 명국일까. 명국은 자기 판단이 아닌 외부의 평가에 기반한다.
지난 1월 차 회장은 국내 공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한국공학한림원 대상을 받았다. 공학한림원 측은 차 회장이 세계 최초로 신체 부위별 직접 측정과 다주파수 측정 기술을 모두 적용한 인바디 기기를 상용화했다는 점과 이를 체성분 분석기 국제표준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공학한림원 측은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을 혁신하고 제품·서비스를 수출하는 등 무역 확대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인정했다.
현재 인바디가 획득한 국내외 특허는 총 94건에 달한다. 1996년 9월 인바디 기기 첫 출시 이래 연구개발을 멈추지 않은 결과다. 지난 2019년에는 세계 최초로 초 고주파수 3MHz 측정 기술을 구현하는 데 성공해, 인바디의 측정 정확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기기 경량화와 디자인 개선도 지속해 외관도 달라졌다. 차 회장은 “다각도로 혁신한 덕분에 오늘날 암, 당뇨병, 신부전 등 여러 질환의 예방과 모니터링에 인바디 제품이 활용된다”며 “이를 활용한 연구 논문은 1만여 편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차 회장의 경영 성과는 명국임에 틀림없다. 체성분 분석이란 신시장 개척에 그치지 않고 뚜벅뚜벅 혁신의 길을 걸었다. 이제는 명국을 되돌아볼 차례다. 바둑 대국은 승자와 패자가 머리를 맞대고 경기를 복기해야 비로소 마무리된다. 앞선 경기에서 자신이 두었던 대로 처음부터 바둑돌을 놓는 것이다. 차 회장과 함께 그의 경영 인생 ‘복기’에 나섰다. 경영자이자 발명가인 차 회장의 인생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유년 시절 발명가적 소질을 발견했던 그는 질풍노도 시절을 거친 뒤 30대 중반 창업에 눈을 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소하게나마 첫 발명품을 만들었어요. 그때는 동네 어르신 구두를 닦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이 재밌었습니다. 다만 매번 구둣솔과 구두약, 받침대를 들고 다니는 건 불편했죠. 그러다 명절 선물로 들어온 사과 궤짝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 궤짝을 일일이 분해한 다음 필요한 나무만 추려 구두닦이통을 만들었어요. 물건을 넣을 수도 있고 구두 받침대로도 쓸 수 있었죠.”
이 외에도 차 회장은 대나무를 잘라 낚시 찌를 만든 뒤 나무가 물에 부풀지 않도록 페인트칠을 하는 등 발명가적 창작을 즐겼다. 스스로 “신나게 놀았다”고 말할 정도로 활동적인 유년 시절이었다. 하지만 해맑은 성격의 소년은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나 홀로 고뇌하는 청년’으로 변했다. 차 회장은 “누나와 남동생이 공부를 엄청 잘하다 보니 남매와 나를 비교하는 주변 사람이 많았다”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라는 의문이 가슴속에 박힌 채 도통 빠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남매와의 비교는 제게 굉장히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심한 열등감 탓에 저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했어요.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또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등 자문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답을 모르겠더라고요.”
차 회장의 ‘자기 탐구’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멈추지 않았다. 연세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그는 전공을 살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3년간 국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등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뇌리에 박힌 궁금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차 회장은 “대학생이 되면, 또 직장에 들어가면 의문이 자연스레 풀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답을 찾을 때까지 질문을 붙잡다 보니 어느새 30대 중반이 돼 있었다”며 너스레를 놓았다.
여러 의문투성이 중에서 가장 답답했던 질문은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대학교수로 진로를 택하거나 직장 생활에 적응한 동기들도 있었지만 그의 적성에는 맞지 않아 보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옛말도 통할 리 만무했다. 사회가 정해준 ‘번지르르한 길’도 차 회장 눈에 들지 않았다. 그는 “명예나 돈을 좇느라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인생을 놓칠까 두려웠다”며 “질문이 참 많은 청년이었다”고 고백했다.
“잘 닦인 포장도로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누가 만들어놓은 ‘성공 로드맵’은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죠. 그런데 3년 동안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조금씩 제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괜찮은 아이디어를 제안해도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흑역사가 계기였습니다. 물론 사회 초년생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일 기업은 당연히 많지 않죠. 하지만 저는 답답했습니다. ‘자그마한 기계를 다루는 사업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죠.”
‘자그마한 기계’라는 어렴풋한 생각이 단초가 되어 차 회장은 미국 유타대 대학원에서 생체공학으로 진로를 틀었다. 다소 작은 크기인 바이오 기계라면 도전해볼 법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 1992년 하버드 의과대학 박사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연구하는 동안 막연했던 사업 방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바디’라는 사업 아이템을 착안한 것도 이때다. 차 회장은 “하버드에서의 2년은 사업 아이디어를 빌드업했던 기간”이라고 규정했다.
1990년대 초반 엑스레이를 활용한 체성분 분석 방법은 방사선 노출 위험이라는 부작용이 상존했다. 이를 보완한 생체 전기 임피던스 분석(BIA) 기기에도 한계점이 있었다. BIA 기술은 인체에 전류를 흘렸을 때 발생하는 전기저항을 측정해 체수분량과 지방량, 근육량 등을 산출하는 기법인데, 측정 자세에 따라 결괏값이 달라지는 등 정확도가 낮았다. 차 회장은 “이것보다 훨씬 안전하면서도 정확도가 높은 체성분 분석기를 만들 수 있겠다고 자신했다”며 “앞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여러 개선안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
1년 3개월 만에 내놓은 ‘세계 최초’ 제품